
여수가 그냥 '밤바다 노래로 유명한 낭만 도시'라고만 생각하고 계셨다면, 저도 한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여수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미식 도시였습니다. 전라남도가 국내 미식 여행지 전국 1위로 뽑힌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저는 입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아침백반은 무조건 먹어야 합니다
여수 여행 첫날 아침, 저는 현지인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백반집 문을 열었습니다. 1인 7,000원짜리 백반 한 상이 나왔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양념 게장, 간장 게장, 갓김치, 꼬막, 김치찜, 그리고 홍합 미역국까지 쟁반 가득 차려졌습니다. 대구에서는 구경조차 못 했던 서대무침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서대무침은 여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향토 음식입니다. 서대는 납작하고 얇은 가자미과 생선인데, 이걸 회로 썰어 막걸리 식초에 버무리는 방식이 여수만의 조리법입니다. 막걸리 식초란 쌀로 빚은 막걸리를 초산 발효시켜 만든 전통 식초를 말하며, 일반 양조 식초보다 향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깊습니다. 여수 인근 섬마다 막걸리 주조장이 있을 만큼 이 지역은 발효 문화가 뿌리 깊은 곳입니다. 그 막걸리 식초로 무친 서대는 새콤하면서도 참기름의 고소함이 먼저 치고 들어오는 맛이었습니다. 아침에 먹기에 자극적일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입맛을 깨우는 데 이보다 좋은 음식이 없었습니다.
진남시장, 로컬 식문화의 진짜 얼굴
아침을 먹고 찾은 진남시장은 저에게 또 다른 여수를 보여줬습니다. 관광객 위주로 구성된 서시장과 달리, 진남시장은 말 그대로 여수 사람들이 장을 보는 공간이었습니다. 산 생선, 자연산 굴, 꿀소라, 살아 있는 문어가 좌판에 올라와 있었고, 갓김치와 가오리회가 반찬집의 기본값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포항에 죽도시장이 있다면 여수에는 진남시장이 있다는 표현이 딱 맞겠다 싶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는 '몰'이라는 해조류도 처음 만났습니다. 몰이란 여수 일대 바다에서 채취하는 해조류의 일종으로, 미역국 끓이듯 조리해 먹는 여수 특산 식재료입니다. 쉽게 말해 여수판 미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해풍을 맞고 자란 쑥으로 만든 찹쌀 떡도 하나 사 먹었는데, 방앗간 앞에 서자마자 코끝에 진한 쑥 향이 먼저 달려왔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시장 구경이란 그 지역의 식문화를 가장 빠르게 흡수하는 방법이 맞더라고요. 그날 챙겨온 갓김치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 밥상에 올랐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침이 고입니다.
여수 아침 백반에서 꼭 챙겨 먹어야 할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대무침: 막걸리 식초로 무친 여수 향토 회무침. 1인분 1만 원 선
- 꼬막 반찬: 고춧가루 없이 꾸덕하게 양념된 건조 방식으로, 다른 지역 꼬막과 식감이 다름
- 갓김치: 여수산 갓으로 담근 것으로, 톡 쏘는 향이 강하고 아삭함이 오래 유지됨
- 홍합 미역국: 짜지 않고 시원한 국물로 해장에도 제격
웅천 친수공원 노을과 화양면 굴구이, 산지에서 먹는 제철 맛
저녁을 앞두고 여순 1019 사건 역사관에 들렀다가 해설사 선생님의 추천으로 웅천 친수공원을 찾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케이블카가 내려다보이는 관광 명소도 아니고, SNS에 도배된 핫플도 아닌데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공원 전체가 붉게 물들었습니다. 장도(長島)로 이어진 작은 다리를 건너며 바위 위에 올려진 조형물을 보는데, 이 공간이 일상 속에 그냥 녹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매일 퇴근길에 이 노을을 볼 수 있는 여수 사람들이 잠깐 부러웠습니다.
저녁은 진남시장에서 굴 파시던 어르신 가족이 귀띔해 준 화양면으로 향했습니다. 화양면 일대는 여수 금천 굴 산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금천 굴이란 여수 화양면 금천 앞바다에서 양식되는 굴로, 조류 소통이 원활한 청정 해역에서 자라 알이 굵고 단맛이 진한 것이 특징입니다. 쉽게 말해 굴 본산지에서 직접 딴 굴을 그 자리에서 쪄 먹는 것입니다.
식당은 양식장을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고, 11월부터 2월까지만 영업하는 제철 한정 식당이었습니다. 굴찜을 주문하자 껍데기째 쪄낸 굴이 한 판 나왔습니다. 제철 식재료(seasonal ingredient)란 말 그대로 그 시기에만 최상의 상태로 먹을 수 있는 식재료를 뜻하는데, 굴은 수온이 낮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가 살이 가장 통통하게 오르는 때입니다. 껍데기 안에 고인 굴 육수를 함께 마시는 순간, 택배로 받아 먹던 까진 굴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그 차이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실제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굴은 국내 패류 생산량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전남 지역이 전체 생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산지에서 먹는 굴의 신선도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숫자로도 이해가 됩니다.
전라남도는 2023년 기준 농림축산식품부 미식 관광 평가에서 전국 1위를 기록했습니다(출처: 농림축산식품부). 제가 경험한 여수 음식들을 떠올려보면 그 순위가 납득됩니다. 백반 한 상, 시장 한 바퀴, 노을 한 편, 굴 한 판이 모두 그 이유였습니다.
여수는 바가지가 심하다, 너무 관광지화됐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물론 유명 관광 거리 중심부에는 그런 곳도 없지 않겠지만, 골목 하나만 빠져나오면 7,000원짜리 아침 백반과 4,000원짜리 떡볶이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여수밤바다 노래가 떠오르는 낭만 말고도, 역사와 제철 식재료와 로컬 시장이 쌓여 있는 여수. 곧 다시 한번 꼭 가볼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짐을 싸고 싶다면 맛난 맛집들 찾아 식당 먼저 예약해 두시길 권합니다.